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게미쓰 마모루 (문단 편집) == 생애 == 1887년 [[오이타현]]에서 출생했다. 오이타현 오노군 미에마치[* 現 오이타현 분고오노시]에서 오노 군수를 지내는 아버지 나오마사(直愿)와 어머니 마쓰코(松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정(시게미쓰 본가)에 아이가 없어 입양된 시게미쓰가 26대 당주가 되었다. 구제 기쓰키 중학교[* 現 오이타 현립 키츠키 고등학교], 제5고등학교를 거쳐서 1911년 [[도쿄제국대학]] 독일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한다. 이어서 외무부에서 관료 생활로 출세길에 올라 중국 공사가 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그것이 일본군의 조작임을 알고도 후원했으며 [[송호정전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휘말려서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해서 나중에 절단하고 [[의족]]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미주리 호의 갑판에 오를 때도 다리를 전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시게미쓰 마모루는 [[외교부장관|외무대신]]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고, [[1944년]]에는 대동아대신을 겸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전권 대사로서 미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또한 미국 측이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자마자 맥아더와 그의 참모장이던 리차드 서덜랜드와 담판을 지어 미국의 점령 정책이 일본 정부를 활용한 간접 통치로 전환되는데 공을 세웠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재판에 대답 및 임했으며, 금고 7년형의 판결을 받아 A급 전범 중 유이하게 금고형을 받았다. 또 다른 한 명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조선계 일본인 [[외교관]]이다.]도 20년의 유기 금고형을 받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공통점은 두 명 다 [[외교관]] 출신의 외무대신이었다는 점이다. 군인 출신 정치인들에 비해 외교관 출신 정치인들은 비교적 형이 가벼웠다. 예외가 있다면 [[히로타 고키]] 정도.] [[1950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형기를 마치지 않고 가석방되었다. 이어서 개진당 총재와 [[일본민주당(1954년)|일본민주당]] 부총재 등을 거쳐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1954년 12월 10일부터 1956년 12월 23일까지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다. [[1957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가석방된지 7년만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